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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신라인의 당나라여행신라시대의 여행은 정치, 경제, 문화 목적의식의 행위
  • 여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 승인 2017.12.12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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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i저널 = 경북 여 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경상북도는 신라사대계 대중화를 위해 지난 21일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수도권대상으로 신라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재강좌를 개최했다.

이날 강의는 부산외국어대 권덕영 교수로 ‘신라인의 당나라 여행’ 이라는 주제로 역사학적 관점에서 사서의 논거를 제시하며 2시간 강의를 진행했다.

여행이란 사업이나 유람 등 어떤목적을 위해 일상적인 생활공간을 떠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행위이다. 신라시대의 중국여행은 당초의 목적의식을가지고 먼 중국을 가서 목적을 달성하여 신라로 돌아오는 일련의 행위라 할수 있다.

신라의 대중국교섭 혹은 왕래는 수·당대부터 본격화되었으므로 신라인은 주로 중국의 당나라를 여행했다고 할 수 있다.

신라 사람들은 관광을 위해 중국을 여행하는 것은 상상할 없으며, 그들은 모두 ‘일(business)’ 때문에 중국을 여행하였다. 그러다 보니 신라에서 중국을 여행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그 수가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첫째, 신라가 중국에 파견하던 사절단 곧 견당사를 들 수 있다. 신라의 사절단으로는 매년 정월 초하루에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보내는 하정사(賀正使), 중국 왕조로부터 특별한 시혜를 입었을 때 보내는 사은사(謝恩使) 등의 각종 명목의 사절단이 있었다.

특히 신라는 당나라에 약 170여 차례 견당사를 파견하여, 당 주변국 가운데 가장 많은 사절단을 당에 파견하였다.

둘째, 서학 구법승과 유학생이 있다. 법흥왕 혹은 진흥왕대의 각덕(覺德) 이후 수많은 신라 승려들이 중국에 들어가 공부하고 돌아왔다. 특히 원광 이후 신라에서는 이른바 ‘서학(西學)’ 붐이 일어날 정도로 중국에 가서 불교를 공부하는 풍조가 유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덕여왕 이후 나라가 망할 때까지 꾸준히 귀족자제들을 국자감 등의 당나라 교육기관에 보내 공부하도록 했다.

셋째, 무역 상인을 들 수 있다. 주로 사무역이 성행한 9세기 이후 많은 신라 상인들이 중국을 왕래하며 국제무역에 종사하였다. 장보고의 청해진 선단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거니와, 그들은 주로 국가의 직접적인 지원이랄까 후원을 받지 않고, 개인 자격으로 중국을 왕래하였다.

신라인의 여행 절차로 출입국 관리에 대한 사례로는 814년 적인선사 혜철(慧徹)의 신라 출국 심사, 847년 대마도 백성들의 신라 불법 입국에 대한 조치 등이 있다.
만약 당나라 왕조의 지시를 어기고 불법적으로 체류 혹은 여행하다 발각되면 곧바로 추방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신라 사람은 아니지만, 838년에 입당한 일본 승려 엔닌(圓仁)은 단기유학생으로 일본 사절단을 따라 당에 들어갔다가 그곳에 장기 체류하기로 마음먹고 사절단에서 무단으로 이탈하여 신라 승려 행세를 하며 내륙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하루 만에 당나라 주민의 신고로 중국 관원에게 체포되어, 귀국하는 일본 사절단의 배에 강제로 승선되고 이탈하여 결국은 재당신라인의 도움으로 마침내 체류를 허락받고 각지를 여행할 수 있었다.

신라인들이 중국을 왕래 할려면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고, 온갖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수도 경주와 당의 수도 장안을 기준으로 할 때, 신라와 중국과의 교통로는 크게 북쪽 길(北路)과 남쪽 길(南路)로 나눌 수 있다.

북쪽 길은 당은포로(唐恩浦路), 황해 해로, 장안로(長安路)로 구성되었다. 남쪽 길은 회진로(會津路), 황해 해로(남부 사단항로), 장안로로 구성되었다.
우리나라의배는 돚이 주 추진 장치이고 노는 기동성을 증진시키기 위한 보조 장치로 바람의 방향에 다라 왕래 되었다.

북서계절풍이 강하게 부는 겨울과 초봄에 중국으로 가는 사람들은 바람의 영향을 덜 받는 북쪽 길을 택하였고, 남서계절풍이 부는 여름에서 초가을 사이에 귀국하는 신라인들은 남쪽 길을 많이 이용하였다.

신라 사람들의 중국 여행은 고되고 힘든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여행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배우고 고급문화를 터득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첫째, 신라인들은 중국 여행을 통해 신문물을 수용하였다. 중국 왕조 가운데 신라인들이 가장 많이 중국을 여행했던 당나라 시대는 중국 문화의 완숙기였다.

둘째, 7세기 초 중원을 통일한 당은 주변국들에게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하자, 세계 각국에서 사절단, 구법승과 유학생, 상인들이 모여들어. 각국의 풍속과 문화를 파악했으며, 신라 문화의 특수성을 자각하게 되었다.

신라인들은 중국 여행을 통하여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또 그것이 신라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음은 사실이다.
신라가 중국 문화에 지나치게 몰입하고 그것을 숭상하는 경향에 따른 부정적인 면도 나타났다.

신라 사람들의 중국 여행을 통해 조성된 이러한 자주의식의 약화와 상실은 고려와 조선시대 일부 지식인들의 맹목적인 존화주의(尊華主義) 혹은 사대사상으로 이어진 어두운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여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iij@ii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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