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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원효와 의상, 같은 목표 다른 길삼국 통합의 새로운 불교사상과 실천의 조화로운 삶
  • 여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 승인 2017.11.2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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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i저널 = 경북 여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경상북도는 신라사대계의 대중화 일환으로 집필진에게 직접 듣는 ‘신라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총 22강좌로 나누어 매주 화, 목요일 개최하였다.

지난 7일 신라사 강좌는 숙명여자대학교의 정병삼 교수의 “원효와 의상 같은 목표 다른 길”이란 주제로 2시간 동안 강좌가 이루어졌다.

신라 불교사상의 정립은 무열왕이 즉위하여 7세기 중반의 신라 왕실은 지방 제도 정비와 중앙제도 개편으로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정비해 왔다.

중대 왕실은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한 후 사회구조의 재편성을 시도하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이루어진 불교계의 제도적인 개편으로 성전사원이 승정기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기층민들의 성장에 따른 신앙적 욕구로 널리 불교를 이해 전파시키는 것이 불교계의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불교의 대중화로 원광 자장의 교단불교, 혜공,혜숙,대안의 길거리불교로 신라 일반민들의 불교을 널리 이해 전파시키는 중여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들의 등장으로 불교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축소 되었다.

신앙의 일반화로 사상적 추구에 주력한 흐름으로는 유식사상과 기신론사상 및 화엄사상 등이 있고, 신앙과 실천을 중시한 흐름으로는 계율과 밀교를 비롯하여 미타 관음 등의 정토신앙이 있었다.

미타(彌陀)신앙은 사람들이 아미타불을 지성으로 염송하면 죽은 뒤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내세신앙이다. 신라의 미타신앙은 별다른 공덕을 쌓을 수 없었던 중고기의 일반민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

관음(觀音)신앙은 국가의 안녕을 빌고 개인적 현세이익을 보장받고자 하는 현실 구제의 성격이 강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미타정토 왕생과 연결된 내세적 경향도 가져서 당시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던 신앙의 하나였다. 현실 구제 중심의 관음신앙은 불국토적 진신신앙이나 변화관음 등으로도 나타났다.

지장(地藏)신앙은 석가가 입멸한 뒤 부처가 없는 말법시대에 하늘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의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망자 구제 신앙이다.

원측은 모든 교설을 방편이라고 보고,마음과마음작용을 모든 인식과 존재의 출발점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궁긍적으로 사물자체가 아닌,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의 인식작용에 달려 있다고 집착과 편견을 제거한 중도을 밝히고자 했다.

원효는 육두품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10대에 출가하여 일정한 스승없이 머무름없이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교학을 섭렵했다

원효는 후배인 의상과 함께 고구려의 보덕에게서 『열반경』 강의를 들음으로써 보다 진전된 불교 사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 원효는 신라로 돌아오고 의상은 초지대 중국으로 갔다

원효는 신라에서 무애행(無碍行)을 일삼아 노래를 지어 세간에 유포시키는 등 대중교화와 기신론소』의 일심이문(一心二門) 이론과 『금강삼매경론』의 일미관행(一味觀行)의 실천원리로 정립하였다.

원효는 여러 저술에서 중관과 유식의 편견에 빠진 교리를 비판하였다. 『기신론별기』에서 원효는 “중관은 모든 집착을 깨뜨리고 깨뜨린 것 또한 깨뜨려서, 깨뜨리는 것과 깨뜨려지는 것을 다시 인정하지 않으므로 이는 보내기만 하고 두루하지 못하는 논”이고, 이에 비해 “유식은 깊고 얕은 것을 두루 세워 법문을 판별하여, 스스로 세운 법을 모두 버리지 않으므로 이는 주기만 하고 빼앗지 못하는 논”이라고 비판하였다.

의상의 불교는 교리탐구와 실천의 원만한 조화로 ls라 화엄사상을 주도한 것은 의상(義相, 625~702)이었다.

의상은 삼국간의 쟁패전이 열기를 더해 가던 진평왕 말년에 진골 귀족의 후예로 태어났다. 스무 살 전후하여 황복사에서 출가하였다. 661년에 다시 중국 유학길에 나선 의상은 바닷길을 통해 당나라에 건너갔다.

장안 남방의 종남산에서 당시 교학을 집대성하여 새로이 화엄을 정립해가던 지엄의 문하에 나아가 화엄을 배웠다. 지엄 화엄의 정수를 체득하고 이를 체계화한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를 저술하였다. 의상은 화엄일승 법계연기(法界緣起)의 핵심을 언어의 절제 아래 210자의 「법계도시(法界圖詩)」로 엮고, 이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법계도인(法界圖印)」을 만들어 그 내용을 『일승법계도』로 정리함으로써 화엄일승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670년(문무왕 10)에 의상은 귀국하여 동해변 낙산 굴 안에 관음 진신이 산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정진한 끝에 관음의 진신(眞身)을 친견하였다. 674년에 황복사에서 화엄을 강의하기도 하였던 의상은 676년에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여 화엄 근본도량을 이루었다. 신라는 이해 11월에 당군을 격파하여 통일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의상이 이끈 화엄종단의 이념은 화엄사상의 평등과 조화의 이론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신분에 따라 구분되는 골품제 사회였다. 의상은 화엄종단 내에서 모든 문도들에게 평등한 종단 운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원효와 의상의 이와 같은 사상과 신앙 운동은 새로운 불교 철학 형성에 노력하던 신라 불교계에 진전된 사상 체계를 제시하는 성과를 이루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의 대중화도 이룩해낸 의미있는 것이었다.

이들의 신앙활동에서 보이는 범부 우선의 정토관이나 기층민 중심의 교단 신앙은 새로운 화합적 의식을 갈망하던 신라 사회에 더없이 적절한 사회의식으로 기능하는 것이었다. 온갖 갈등이 그물망처럼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도 원효와 의상이 실천했던 조화로운 사상과 행동은 다시 음미해볼 이유가 있다.

여홍, 송지환, 이보슬 기자  iij@ii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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